September 29, 2010

어지러운 시기의 또 하나의 지혜 - 종침교



서울琮沈橋의 來歷

지금은 없지만 얼마전까지도 서울 사직동(社稷洞)가는데 종침교(琮沈橋)라는 돌다리가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다리는없지만 그 근처를 종침교다리라고 구명을 부르는 사람이 있다. 이다리가 종침교(琮沈橋)라는 이름을 갖게된것은 리조 성종(成宗)대왕 때 허종(許從)이라는분이 말을 타고 오다가 이 다리에서 떠러진 일이 있어 그런 이름이 붙게된것이다.
성종(成宗)이 즉위하신지 얼마안되여 왕비 한씨(韓氏)께서 도라갔다. 그래서 후궁윤씨(尹氏)가 원자 연산군(燕山君)을 탄생했으므로 윤씨를 책립해서 왕비를 삼었다.
그러나 윤씨는 덕이 박해 질투심이 깊고 후궁 내인들을 미워해 왕의 앞에서도 여러 가지 어질지 못한 일을 저지르매 왕께서는 크게 노하시며 윤비를 내치시는 동시에 죽엄을 명하시기 위해 제신을 모으고 이를 외론하시였다.
성종의 노하심이 극하신데다가 원체윤비가 부덕함을 아는 여러 신하는 거의 다 임군외전에? 찬둥하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령의정(領議政)으로 있든 허종 어른도 그 회의에 참례하기 위해 대궐로 드러가는 도중에 잠간 그 누님의 집에를 들렸다. 누님은 허공을 보고
「민가의 종이 주인의 명령이라고 주인 부인을 죽이면 후일 그 아들이 자라 다시 그 아들을 섬길 때 그 아들이 자기 어머니를 죽인 종을 가만이 둘리가 있겠소」
하고 충고했다. 그말을 듣고 허공은 깨다라 누님의 집을 나와가지고 돌다리를 건너가다가 일부러 말에서 떠러저 발을 다쳤다. 그리해 이것을 리유로 그 회의에 빠지었다.
그뒤 성종이 귀천하시고 연산군이 왕위에 올렸다. 연산은 처음부터 늘 그 모비의 도라감을 원퉁이 생각고 있든 판이라 왕위에 오르자 그당시 폐비회의에 참석했든 사람을 모두 죽여 버렸다. 그래서 당시 충신들도 모두 해를 입었다.
그러나 허종어른만은 참례치 아니했든 까닭에 화를 면했다.
그래 뒤 사람들이 허공이 락마한 다리를 허종이 빠진다리라고해서 종침교라고 불렀다.